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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뿌리논쟁 바로알기

제중원 뿌리논쟁은 1980년대 초 한국의 근대의학 100주년 기념사업에 즈음하여 그간 누구나 세브란스의 기원이라고 여기던 제중원을 그것이 한때 조선정부 소속 기관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서울대학 측이 자신들의 기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는 서울의대 측이 일제가 설립한 제국대학을 직접적인 전신으로 하고 있는 까닭에 그동안 취약하게 남아 있던 역사적인 정통성을 만들어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제중원을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의 부담스러운 과거인 제국대학의 역사를 건너뛰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실제로 서울의대와 서울대병원은 기관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경성제대나 총독부의원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언론에서는 제중원 뿌리논쟁을 제중원이라는 제3의 대상을 두고 연세대와 서울대가 서로 자신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기술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오해이다.


이러한 불필요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당사자는 서울대학 측이며 세브란스는 불가피하게 이 논쟁에 끌려들어간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처음 시작된 이 논쟁은 이후 여러 과정을 거치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본 연재에서는 그간 제중원 뿌리논쟁이 진행되어온 과정을 먼저 살펴보고 이어서 이 논쟁에서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 기관의 기원인 제중원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_1기

제1기 (1978-1997)


제1기는 1978년 서울의대가 ‘서울大學校 醫科大學史(1885-1978)’란 책에서 제중원이 자신들의 뿌리라는 주장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本 大學附屬病院의 始初는 이보다 14年 앞선 1885年 3月에 齊洞에 設立된 王立病院인 廣惠院이라 하겠다. 財政難으로 한때 官制가 폐지되어 私立醫療機關으로 하여금 運營케 하였으나 國立인 지금의 서울大學校 醫科大學 附屬病院은 廣惠院에 비롯된다.”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사학계의 오랜 정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것이었다. 더욱이 서울대 사회학과의 신용하 교수가 규장각 자료 운운하면서 합세하여 대단한 학문적 근거가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신 교수는 1982년부터 몇 년 동안 수차례의 기자회견을 통해 제중원은 결코 사립화 되지 않았으며 1894년 에비슨에게 위탁경영을 시켰다가 1905년에 환수하여 이를 서울의대가 자신들의 전신이라고 내세우는 광제원의 확장에 사용했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제중원은 연세의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서울대로 이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러는 사이 연세대학교가 창립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의학계 원로 정구충 박사가 대학의학협회지 1984년 10월호에 기고한 “한국의학 100년”이란 원고가 서울의대측 편집위원에 의해 변조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그런데 그동안 기자회견만을 했던 신용하 교수가 1995년에 들어 “광혜원과 근대의료의 출발”이란 글로서 자신의 정식 견해를 밝혔다. 신 교수는 이 글에서 1905년 4월 10일의 ‘제중원 반환’, 1906년 5월 29일의 ‘제중원 찬성금’ 및 ‘광제원 확장비’와 관련된 자료가 제중원은 결코 사립화되지 않았다는 증거라며, “광제원 확장비”가 환수된 제중원의 모든 시설을 인수했다는 문제를 푸는 “보배 같은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편승해 서울의대 출신인 주근원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경위를 세브란스 病院側에서 그 由來와 傳統을 이어받은 것으로 즉 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하고 ‘醫學百年’이라는 冊子에서 밝히고 있어 서울大學校病院과 뿌리의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쓰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서울의대 및 신용하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제중원은 국립병원이었다.

2) 1894년 에비슨에게 위탁경영을 시켰다.

3) 1905년 환수하여 광제원 확장에 사용하였다.


한편 연세의대는 1996년 2월 1일 의사학과를 신설하고 이러한 서울의대의 억지 주장에 대해 학문적으로 대응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자료를 수집 검토하기로 하고, 우선 신용하 교수가 주장한 사실의 확인을 위해 규장각에 있는 여러 자료들을 검토하였다. 이때 몇몇 자료들을 발굴했는데 그 내역을 상세히 연구한 결과 신용하 교수의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 주장임이 밝혀졌다. 모든 자료를 검토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일부 자료를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첫째, 제중원 설립에 조선정부가 개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왕조국가인 조선에서 국립이라는 표현은 역사적으로 사용된 적도 없고 적절한 표현도 아니다. 국립 서울대병원과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왕립이 국립으로 돌변한 것이다.


둘째, 에비슨이 1894년부터 1905년까지 제중원을 위탁경영했다는 것인데, 위탁경영이라는 표현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으며, 단지 사료상으로는 에비슨이 병원의 전권(전관판리, entire charge)을 행사한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셋째, 신교수는 제중원이 광제원으로 통합·확장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제중원이 세브란스로 이전한 후, 구리개 제중원은 병원도 아닌 외교 고문관 스티븐스의 관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1998년 3월 명백한 사료가 언론에 발표되자 신용하 교수는 더 이상 논쟁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였고, 제중원의 위탁경영 혹은 환수 등 서울의대 측의 억지 주장은 학문적으로 근거가 없음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_2기

제2기 (1998- 2007)


이러는 사이 서울의대측은 집요하게 또 다른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서울대병원은 국가중앙병원이며, 그 위상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1997년 10월 1일자 서울대학교병원보에 실린 ‘병원 연혁에 관한 좌담회’에서 근대의학 도입, 발전 과정서 국가중앙병원의 역할을 살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중앙병원’으로서의 서울대학교 병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3명의 사학자를 고용하여 2005년 ‘병원사연구팀’을 구성하고 ‘대한의원 100주년, 제중원 122주년 기념 사업추진단’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2007년에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식과 함께 제중원 122주년 기념행사를 가지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대한의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서울대학병원측이 대한의원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는 「서울대학교 병원사」에 실린 대한의원의 설립에 대한 서술에 잘 나타난다. 거기에는 대한의원의 설립이 “명실상부한 大韓民(帝)國의 중추적 의학교육, 연구, 진료기관으로 발돋움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기록하여, 일제가 광제원, 적십자병원, 의학교를 강제로 통합해 대한의원을 만든 것이 우리나라 의료계를 위해 대단한 공헌이자 발전인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술태도는 대한의원 설립의 실질적인 주체나 설립의도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내지는 간과하고 외형적인 현상만으로 이를 ‘발전’이라고 단정한 것으로, 이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식의 역사인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럼 대한의원은 어떤 기관이었나? 대한의원의 설립은 통감 이또오 히로부미의 구상으로 그는 대한제국에 의해 나름대로 운영되고 있던 광제원, 의학교, 적십자병원을 하나로 통폐합하여 식민지적 의료 체계에 적합한 기관을 만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1906년 7월 일본 육군 군의총감 사또(佐藤 進)를 위원장으로 하고 의학교 교관 고다께(小竹武次), 대한적십자병원 주임 요시모토(吉本潤亮) 등 일본인만으로 구성된 ‘大韓醫院創立委員會’를 조직하고 여기서 대한의원의 설립을 결정하게 하였다. 즉 대한의원은 이미 실질적인 주권을 상실한 우리 정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일제에 의해 강제로 그 건립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기관은 “명칭은 대한의원이지만 통감부에 의해 운영되는 의료와 교육, 그리고 위생업무를 담당하는 보건기구로 외관으로는 한국민을 위한 발전된 최신식 의료시설로 선전되어 전시효과에는 큰 몫을 하였으나, 실은 한국에 와 있는 일본인 관리 및 그 가족, 그리고 일본인 거류민의 보건을 위한 의료시설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대한의원의 설립에 대해 당시 우리나라의 언론은 지극히 비판적이었다. 의학교, 광제원, 적십자 병원을 세워 자주적인 의료체계의 확립을 기도했던 대한제국의 노력은 1905년 일본이 국권을 침탈하면서 좌절되고, 이들 기관들이 대한의원이라는 식민지 의료기관으로 전환됨으로써 단절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본 것처럼 대한의원은 조선정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식민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일제 통감부의 주도로 만들어진 병원이다. 그런데 이처럼 일제가 설립한 병원을 대한민국의 대표적 국립의료기관이라 자칭하는 서울대학병원에서 13억원이란 거액의 국고를 들여 기념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 서울대병원 측은 대한의원 기념행사를 홍보하며 처음에는 대한의원의 설립이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설립의 책임자뿐 아니라 건립위원회의 구성원들 전원이 일본인들이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설립의 전 과정이 조선정부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통감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어디에서도 밝히지 않았다.


그 대신 대한의원 설립이 대한제국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과 고종의 형식적 재가와 순종의 개원칙어 등만을 강조하며 대한의원의 식민지적 성격을 애써 감추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안전장치로 제중원 122주년도 함께 연결시켰다. 이는 혹 대한의원의 식민지적 성격이 지적되더라도 대한의원을 제중원과 연결시킴으로써 대한의원의 식민지적 성격을 희석시켜보겠다는 의도로 풀이할 수 있다. 또 한 편으로는 대한의원 100주년만을 기념한다면 서울대 측이 이제 제중원을 포기하는 듯한 인상도 줄 수 있으므로 다소 어색하더라도 제중원 122주년을 덧붙여야 한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필자는 이 행사를 비판하는 ‘서울대학병원 1백주년, 기념할만한 일인가?’란 제목의 글을 교수신문에 기고했다. 그 내용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만든 병원을 왜 서울대병원이 기념하느냐는 것이었다. 대한의원 기념사업에 대한 논란은 「신동아」에 기사화되었다. 기사 말미에는 서울대병원 병원사연구실 전우용 팀장이 대한의원은 한국 의료계 전체가 반성적으로 공유할 경험적 자산이라며, 기념에 대해 세브란스병원이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실렸다. 이후 이 논쟁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기사화되었고, 당사자들의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졌다.


한편 2006년 10월 26일 열린 2006년도 국정감사 교육위원회 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국회의원들은 서울대병원이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사업에 14억원이란 거액을 투입하는 것을 지적하고 기념행사는 정당한 역사적 조명이 될 수 있는 학술행사로 제한하고 음악회와 한마음축제 등의 기념행사는 이사회에서 재논의하라고 촉구하였다.


한편 서울대 측은 대한의원 10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우정사업본부에 기념우표 발행을 신청하였다. 이에 대해 각계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결국 기념우표는 발행되었다. 2007년에 들어 서울대병원장은 신년사에서 ‘2007년은 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 122년이 되는 우리에게 있어 기념비적인 해’임을 언급하였다.


3월 15일의 대한의원 100주년, 제중원 122년 행사가 가까워지며 이 행사에 대한 여러 비판들이 제기되었으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서울대 병원 측은 일제 식민지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는 회피성 발언만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서울대병원의 대한의원 기념사업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월8일 발표한 “국립 경북대병원과 서울대병원은 100주년 기념사업을 즉각 중단하라”는 제목의 성명서에서 이 사업은 해방과 독립의 역사를 부정하는 행위로 규정짓고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성명서는 많은 매체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또한 이를 계기로 서울대병원이 당초 의도했던 제중원과의 연결고리 보다는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에 일반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다. 2월 말이 되면서 기자들의 취재가 계속되자 논리가 궁색한 서울대병원 측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급기야는 그간 해온 주장을 번복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기념행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정당화했다.“도둑질을 한 아버지라도 제사는 지내야 한다. 다만 축하 개념의 기념이 아닌 단순한 기억 의미의 기념일 뿐이다.”

제중원 뿌리논쟁의 경과_3기

제3기 (2007- 현재)


대한의원 기념사업의 강행으로 홍역을 치른 서울대병원은 이후에는 대한의원과 관련된 언급이나 주장을 더 이상 하지는 않는다. 대신 제중원에 대한 책자들을 잇달아 발간하며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서울대병원의 시작이라는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점에 대해서는 이후 차례로 논의하겠다.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활 _ 제중원의 설립 과정

제중원의 설립 과정 


갑신정변의 와중에 심한 자상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된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써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된 알렌은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우선 의사로서 국왕인 고종과 민비의 시의로 임명되었다. 또한 왕의 어머니인 조대비를 치료하기 위해 그 거처 안까지 들어간 것 역시 외국인, 그것도 남자 의사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처럼 조정의 신임을 얻고 자신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자 알렌은 자신감을 얻고 해외 선교에 나섰던 자신의 뜻을 펼칠 방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85년 1월 22일 미국 공사관 대리공사인 폴크를 통해 서양식 병원의 설립을 다음과 같이 조선정부에 건의하였다.


“조선정부가 만약 병원을 건설한다면, 저는 마땅히 최고책임자의 역할을 다할 것이며, 귀 정부가 제공하는 급여는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단지 몇 가지 요구되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 서울에 공기 좋고 청결한 가옥 한 채. 둘째, 병원 운용에 필요한 등촉 및 연료, 보조원, 간호사, 하인 등의 월급, 가난한 환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한 음식 등. 셋째, 각종 약재비 삼백원 정도 등. 조선정부가 이것들에 대해 허락할 뜻이 있다면, 저는 또한 의사 1명을 자비로 초청하겠으며, 6개월 후에는 이 병원에 근무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그 의사는 조선정부로부터 급여를 받지 않겠습니다. 급여를 받지 않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에는 백성들을 돕기 위해 설립한 병원사(病院社, benevolent society)라는 조직이 있는데, 저와 그 의사는 그 조직에서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병원은 청나라의 베이징, 톈진, 상하이, 광둥 등과 다른 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두 개의 병원은 리훙장 자신이 스스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병원을 건설하는 것이므로 이 병원은 조선정부의 병원이며, 백성들은 병이 생기면 삼가 몸을 살필 수 있으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조선의 대군주께서 만약 동의해주신다면 흔쾌히 처리될 거라 생각합니다.”(알렌의 「조선정부 경중건설병원절론」 중에서)


알렌은 이 건의문에서 조선정부가 병원 건물과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하면, 자신은 미국의 자선단체에서 급여와 생활비를 지원 받으며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렌의 병원설립계획은 당시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묄렌도르프의 방해를 받았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고종의 계속적인 호의와 지지에 힘입어 병원설립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알렌 스스로도 병원설립안이 예상보다 훨씬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서양식 병원을 원했던 조선정부는 병원설립안의 협의를 위해 1월 27일 관리 두 사람을 알렌에게 보냈다.


그리고 2월 16일에 병원설립을 담당할 조선 측 대표로 김윤식을 임명하였다. 2월 18일 김윤식은 미국공사관을 방문하여 병원 건물로 현재의 헌법재판소 구내 북서쪽 부분인 재동 35번지에 해당하는 홍영식의 집이 선정되었다고 전해주었다.


이어서 1885년 4월 3일 외아문에서는 새로운 병원의 개원 사실을 공포했다. 포고문은 북부 재동에 미국인 의사가 진료하는 병원을 개설하였고, 진료비에 해당하는 약값이 무료이니 누구나 진료를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알렌은 미국 선교부에 필요한 약품과 의료 기구를 주문했고 4월 9일부터 환자를 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은 특별한 개원 의식 없이 4월 10일 개원했다.


고종은 1885년 4월 12일 병원의 명칭을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란 뜻으로 ‘광혜원(廣惠院, House of Extended Grace)이라 붙였다. 하지만 4월 26일 ‘사람을 구하는 집’이란 의미의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칭하였다.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활 _ 조선정부는 병원을 설립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조선정부는 병원을 설립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병원설립의 과정은 알렌이 주도했다. 알렌은 조선정부에 보낸 제안서에서 병원으로 사용할 건물 하나와 약간의 운영비만 지원한다면 자신은 무료로 그 병원에서 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알렌의 제안을 조선정부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개항 이후 조선정부는 서양의 문물을 도입할 의사를 갖고 있었다. 서양의학의 도입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재원이었다. 의학을 비롯한 서양문물의 도입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실현된 부분은 많지 않았다. 특히 서양의학을 도입하려면 외국에서 의사를 초빙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액수를 부담해야 하지만 조선정부는 돈이 없었다.

조선의 상황은 개항 후 일본의 서양문물 도입 과정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된다. 19세기 후반 이미 조선에 비해 월등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던 일본은 개항과 함께 각 분야의 전문가를 외국에서 초빙했고, 초빙된 외국인들이 놀랄 정도로 후한 보수를 지불했다. 의학의 경우만 하더라도 동경대 의대를 세울 때 독일로부터 두 명의 의학박사를 초빙했다. 이들의 흉상은 지금도 동경대 의대 캠퍼스 내에 있다.

아쉽게도 조선은 일본과 달리 풍부한 재원을 바탕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의학의 경우도 서양의학 도입의 필요성은 논의되었지만 그것을 조선정부가 일본처럼 주도적으로 실현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재정의 부족 때문이었다. 서양의학 도입의 의사는 있으되 그 의사를 실현할 재원이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알렌의 제안 당시 조선정부가 처해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차에 알렌의 제안은 정말 매력적인 것이었다. 초빙을 하지도 않은 서양의사가 제 발로 조선에 찾아와서 건물과 운영비만 지원하면 무료도 진료를 하겠다니 조선정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알렌의 제안 이후 병원 설립이 알렌도 놀랄 정도로 빨리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활 _ 서울대병원의 역사인식이 가지는 문제점

서울대병원의 역사인식이 가지는 문제점


제중원 설립 과정에서 알렌의 제안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병원은 알렌이 없었더라도 언젠가 병원은 설립되었을 것이므로 제중원 설립과정에서 알렌의 역할을 별것이 아니고 무시해도 좋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학문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우선 이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을 근거로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의 의미를 폄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역사는 실제로 이루어진 사실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학문이지 이루어지지 않은 가정을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는 소설이 아니다. 지금도 일제의 지배가 지속된다는 가정 하에 쓴 가상소설이 있었다. 이처럼 실현되지 않은 가정 아래 쓰여진 글을 소설이라고 하지 역사라고 하지는 않는다. 서울대병원은 제중원에 관한 역사가 아니라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것 같다.


서울대병원식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가지는 또 다른 문제점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누가 아니어도 어차피 어떤 사건은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 사건에서 그의 역할은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 서울대병원의 역사관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했던 행위의 내용과 그 의미를 묻고 평가하는 학문이다. 현실로 존재했던 역사적 인물을 누군지도 모를 가상의 익명의 인물로 대체하여 역사적 인물에 대해 자의적 평가를 일삼는 행위는 역사가 아니다. 만약 그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이완용이 아니어도 어차피 일본은 조선을 합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가 이완용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따라서 한일합방에서 이완용의 역할은 무시해도 좋다는 몰역사적 결론에 이른다.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활 _ 알렌은 조선정보의 고용의사였나

알렌은 조선정부의 고용의사였나


알렌을 제중원의 역사에서 지우거나 최소한 그 의미를 축소시키기 위해 서울대병원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주장은 알렌을 비롯한 선교의사들이 조선정부에 의해 고용된 의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일반적으로 갑과 을의 고용관계에서는 계약서가 필요하고, 계약서에는 계약기간, 보수, 계약조건 등이 제시되기 마련이다. 실제로도 조선정부는 1899년 학부에서 설립한 의학교 교관으로 일본인을 고용한 적이 있는데, 그 계약서에는 위와 같은 계약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중원 의사들에게서 이러한 계약서와 계약내용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더군다나 병원설립을 직접 제안한 알렌에게 고종이나 조선정부가 계약관계를 요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조선정부가 제중원에서 일하는 선교사와의 관계에서 뭔가 불만스런 내용이 있을 경우, 그것을 해당 선교사에게 직접 말한 것이 아니라 미국 공사관을 통해 전달하였다. 만약 서울대병원의 주장처럼 알렌이 조선정부의 고용의사에 불과했다면 본인에게 직접 말하거나 통보하면 되지 미국 공사관을 통해 조선정부의 의사를 전달하는 복잡한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제중원이 사실상 온전한 조선정부의 병원이 아니라 미국과의 외교 관계 속에서 실제로 의료를 담당했던 미 북장로교 선교부와의 동거 속에서 운영되었던 일종의 합자병원이었음을 말해준다.

제중원 설립과 알렌의 역활 _ 알렌은 조선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았나

알렌은 조선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았나 


서울대병원에서는 알렌이 조선정부로부터 신수비를 받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알렌이 조선정부의 고용의사였다는 주장을 편다. 신수(薪水)란 땔감과 음료를 지칭하는 것으로 신수비란 월급, 생활비, 보조금 등의 뜻으로 사용된다. 알렌은 1887년 1월부터 13개월 동안 매달 50원의 신수비를 받은 전례가 있다. 1886년 근대교육을 위해 설립한 육영공원의 교사 월급이 160원이었던 것에 비해 1/3에도 미치는 못하는 액수였다.


만약 알렌이 받은 돈이 제중원에서 일한 것에 대한 월급이라면 왜 의사의 월급이 교사 월급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가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아직까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다. 기껏해야 50원도 당시 조선의 형편에서는 많은 돈이었다는 정도의 설명만을 내어놓는 형편이다.


먼저 알렌이 받은 신수비의 액수를 볼 때 이 돈은 제중원 근무에 대한 월급이라기보다는 조선정부가 알렌의 활동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급하는 일종의 사례금의 성격을 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알렌은 자신이 받은 신수비의 성격을 밝힌 바 있다. 알렌은 귀국 후 출판한 책 Thing Korean(1908)에서 자신이 조선정부로부터 받은 돈은 국왕의 어의로서 일한 것에 대한 사례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어의는 상근직이 아니어서 궁궐에서 요청이 있을 때만 들어갔다.


알렌은 이 책에서 어의로 일하는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주로 밤에 불려가는 일이 많아서 밤에도 정장을 하고 있어야 하는 어려움. 또 왕자가 아프다고 해서 갔는데 잠들어버려서 기다려야 했던 어려움 등을 토로하고 있다. 그리고 어의로서의 활동에 대한 대가로 사무실과 사례금, 각종 선물들이 주어졌다. 제중원 근무는 본인이 자청한 것이라 보수를 받지 않았지만, 어의로서의 이러한 번잡한 일들을 그가 무료로 수행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당연히 그에 대한 보수를 받았을 것이다.


알렌은 영국 공사관, 청국 공사관의 의사로도 일했는데 이 역시 상근직은 아니고 요청이 있을 때만 가서 진료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들 공사관 의사로 일하는 대가도 월 50원 정도로 알렌이 정부에서 받은 신수비와 거의 같다. 이를 통해 당시 어떤 기관의 비상근 자문의가 받는 적정 보수가 월 50원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알렌뿐 아니라 헤론과 에비슨이 신수비를 받은 것도 어의로서의 수고에 대한 보수였고, 비상근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적은 50원을 받았을 것이다. 알렌은 처음 그의 제안대로 제중원에서는 무료로 봉사를 했다. 따라서 어의로서의 수고에 대한 대가를 제중원 근무에 대한 월급으로 간주하고, 이를 근거로 알렌이 정부의 고용의사에 불과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제중원 국립병원설의 허구_ 제중원은 국립(National) 병원이었나?

제중원은 국립(National) 병원이었나?


제중원은 알렌의 요청에 의해 조선정부에서 설립한 병원이었으며, 내용상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조선정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동안 제중원의 운영주체를 두고 다소의 논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제중원의 운영이 어느 한쪽에 의해 일방적으로 좌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가 제중원을 바라볼 때 정부의 병원이자 선교병원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시 설립 주체에 관한 문제로 돌아와 제중원이 조선정부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국립’이라고 표현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제중원을 지칭한 당시의 어떤 사료에서도 제중원을 ‘국립’이라고 표현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중원을 지칭할 때는 왕립(왕실), 공립, 혹은 정부의 병원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였으나 근대국가에 한해서 붙일 수 있는 ‘국립’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또 제중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설립 이전 우리나라 역사상에 존재했던 모든 정부 기구나 기관을 지칭할 때에도 ‘국립’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없었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이나 조선시대의 성균관이 나라에서 세운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국립 국자감’이나 ‘국립 성균관’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국립이라는 호칭은 근대국가인 대한민국이 설립한 기관을 지칭할 때에나 적합한 말이지 왕조 시대의 국가가 세운 기관을 지칭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국립’은 원래 존재했던 용어가 아니라 ‘national’의 번역어로 만들어진 용어이다. ‘nation’은 근대적 민족국가를 말한다. 때문에 서양에서는 근대 이전 왕정 시대에 세운 기관을 ‘왕립(royal)’기관이라 하지, 거기에 ‘국립(national)’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국립’은 근대국가가 설립한 기관에만 붙일 수 있는 용어이므로, 한국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운 기관에 대해서만 붙일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이나 고려 등 전근대 왕조시대에 만들어진 기관들에 ‘국립’이란 수식어를 무분별하게 붙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명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역사적인 용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중원을 굳이 국립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서울대학병원과 제중원을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제중원 국립병원설의 허구_ 서울대병원의 설립주체는 누구인가?

서울대병원의 설립주체는 누구인가? 


서울대병원의 설립주체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국가’라고 답한다. 이 대답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부정확하거나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대답은 당신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사람’이라거나 ‘남자’라고 답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질문자의 의도는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 혹은 남자들 가운데 어떤 특정 개인이 당신의 아버지인가를 말해달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울대병원의 설립주체가 누구냐는 질문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고 존재했던 많은 국가들 가운데 어떤 국가가 당신의 설립주체인가를 묻고 있다. 서울대병원이 특정한 역사적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특수한 개별 병원이지, 보편적 국립병원의 이데아가 아닌 다음에는 대한민국이 자신의 설립주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병원은 이 질문에 대해 시종일관 자신의 설립주체는 국가라는 무의미한 대답을 계속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왜 이처럼 무의미한 답변을 고수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제중원을 국립병원으로 규정한 의도와 맞닿아 있다. 서울대병원의 설립주체를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국가로 인정하는 순간, 제중원은 조선이라는 특정 나라의 병원이 되고, 서울대병원의 물리적•실질적 전신인 조선총독부의원의 설립주체는 일본제국임이 드러난다.


그렇게 되면 서울대병원은 제중원과 자신의 연속성을 주장하려다 조선국-일본제국-대한민국을 연속적 주체로 인정해야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 서울대병원은 제중원의 설립주체를 보통명사인 국가로 규정하고, 자신의 설립주체 역시 대한민국이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인 국가로만 규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서울대병원이 고유명사로서의 국가와 일반명사로서의 국가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의도적으로 범하고 있는 이유가 분명히 드러났다.

제중원 국립병원설의 허구_ 국가중앙병원설은 왜 등장했는가?

국가중앙병원설은 왜 등장했는가?


최근 서울대학병원의 기원에 관해 이루어진 논의 가운데 조선정부에 의해 세워진 제중원이나 광제원이 대한민국이 설립주체가 되는 서울대병원의 직접적인 전신으로 보기는 어려우므로 이들의 법률적인 승계관계에 집착하기보다는 “근대의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발달하는 과정 속에서 각 시대의 국가중앙병원이 수행해 온 역할을 살펴보는 가운데 서울대병원의 역사적 모습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란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이것은 “오늘의 서울대병원의 위상이라든가 성격, 지향하는 바 등과 관련해 과거 병원들의 성격과 모습 등을 파악함으로써 ‘정신의 계승’ 차원에서 서울대병원의 기원 문제에 접근해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소위 ‘국가중앙병원설’이다.

이는 서울대병원과 제중원을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많으므로 이를 우회하기 위해 한 발을 빼는 전략으로 볼 수 있다. 사실 1978년 서울대병원이 법인화된 이후 서울대병원은 엄밀히 말해 더 이상 국립병원의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법률적 위치에서 파생될 수 있는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정신적 차원의 계승을 말하게 되었고,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국가중앙병원설이다.

먼저 여기서 살펴보아야할 점은 서울대학병원이 ‘국가중앙병원’이라고 했을 때 ‘국가중앙병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단어상 그것은 우리나라의 모든 병원들이 서울대병원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말로 보인다.

도대체 누가 그런 역할을 서울대병원에 부여했으며, 국가중앙병원의 정의를 내렸는가? 누구도 그에 대해 정의를 내린 바 없는데, 서울대병원이 스스로를 ‘국가중앙병원’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극히 제국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서울대병원은 다른 국공립병원이 지자체나 보건복지부에서 관리를 받는 것과는 달리 교육부 산하에 있다. 서울대병원의 관할을 보건복지부로 옮기는 문제가 나왔을 때, 서울대병원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처럼 다른 국공립병원의 네트워크와 동떨어져서 별개로 존재하는 병원이 무슨 근거로 국가중앙병원이라는 주장을 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제중원 국립병원설의 허구_ 제중원은 조선시대 국가중앙병원인가?

제중원 국립병원설의 허구_ 제중원은 조선시대 국가중앙병원인가?


조선정부는 알렌의 제안에 의해 광혜원을 설치하며 그것이 이미 혁파된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의 정신과 역할을 이어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여기서 혜민서는 조선시대의 의료체계인 삼의사(三醫司) 체계에서 세 번째 지위를 차지하는 기관으로 주로 돈이 없어 의료헤택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백성들의 질병 구료와 여기에 소요되는 약재의 관리를 맡던 기관이었다. 혜민서에서는 의학교육도 담당했으나 이는 전의감(典醫監)보다는 한단계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활인서는 삼의사(三醫司)에 포함된 기관은 아니지만 혜민서 다음의 지위를 차지하는 의료기관이었다.

활인서에서는 주로 도성 내의 가난한 병자들을 구료하였는데 특히 기근과 전염병이 돌 때 일반 백성의 구호를 담당하였다. 요컨대 혜민서와 활인서는 빈민구료를 위한 의료기관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내의원(內醫院)은 왕을 비롯한 왕족의 치료를 담당하는 것이 본래 의무였으며 의서의 편찬과 같이 국가가 주관하는 주요한 의학학술활동도 내의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밖에 왕실용의 약재도 관리하는 등 내의원은 조선시대를 통해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의료기구였다.

다음으로 전의감은 내의원에 이어 두 번째 지위를 차지하는 의료 기관으로 정부의 중앙관료와 종친의 진료를 맡고 있었고 그밖에 의학교육, 구료관 파견, 궁중용 약재의 공급과 하사 등의 일도 담당하였다. 특히 의학교육에 있어서는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는 의학교육기관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시대에 정부에서 관장하던 의료기구 중 소위 서울대병원에서 생각하는 ‘국가중앙의료기관’에 해당하는 것은 내의원과 전의감이며, 같은 정부기관이기는 하지만 혜민서와 활인서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치료를 주로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서울대병원의 관할을 보건복지부로 이관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서울대병원은 그렇게 되면 다른 국공립병원처럼 대민진료에 치중하게 됨으로써 연구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이관을 강하게 거부했다.

즉 대민진료는 서울대병원의 입장에서 중요한 고유의 기능이 아닌 것이다. 사실 서울대병원은 혜민서와 그를 이은 제중원이 아니라 내의원이 되고 싶어 하며,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왔다. 그런 서울대병원이 이제 와서 대민진료기관이었던 제중원의 정신을 이어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이율배반적이다.

제중원 국립병원설의 허구_ 서울대병원은 조선왕조의 공공의료정신을 계승하는가?

서울대병원은 조선왕조의 공공의료정신을 계승하는가?


국가중앙병원설과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서울대병원이 제중원과의 연속성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우는 논리가 서울대병원이 조선시대 공공의료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제중원과의 직접적 연결을 주장할 때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조선총독부의원이나 경성제대와의 연속성 문제를 피해가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이다. 사실 제중원을 서울대병원의 기원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한의원, 총독부의원, 경성제국대학 등 일제 식민통치기관들의 존재이다.

서울대병원은 대한의원의 우수성과 서울대병원과의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대한의원, 총독부의원,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은 연속성은 거론하지 않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대한의원이 이토 히로부미의 기획으로 설립된 병원임에도 대한제국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일제의 식민기관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대한의원이 일제의 식민기관으로서 총독부의원,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경성제대 부속의원 등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서울대병원이 국립병원의 논리로 제중원과의 연속성을 주장하려면 일제강점기 총독부의원,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등까지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서울대병원은 이를 의식해 실질적인 연속성이 아니라 제중원의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이라고 발을 빼기 위해 만든 것이 조선시대 공공의료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민주국가의 국립병원이 ‘국왕의 시혜’라는 과거 왕조시대의 이념에 따라 세워진 병원과 자신을 정신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제중원이 백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료를 베푸는 궁극적 주체는 국왕이다. 왕조시대의 의료는 군주가 백성을 어여삐 여긴다는 가부장적 봉건 이데올로기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 민주국가에서 의료는 국왕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이다. 서울대병원은 왕조국가 조선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세운 병원이다.

따라서 서울대병원이 가공의 기원 만들기를 통해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과거 왕조시대 시혜 이데올로기에서 자신의 정신적 기원을 찾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 초기 제중원의 이중성

초기 제중원의 이중성


알렌의 제안에 의해 설립된 제중원은 형식적으로는 조선정부의 기관이었으나 내용적으로는 미북장로교 선교부와,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미국과 공동으로 운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조선정부가 제중원을 국내 업무를 관장하던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 소속으로 두지 않고 외교와 통상 업무를 관장하던 외아문(外衙門) 소속으로 둔 사실이다. 이는 당시 조선정부가 서양 의술을 펴는 사업을 국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외국의 문화를 수입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제중원의 설립이 조선정부와 알렌 개인의 관계 속에서 비롯되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선정부와 미국의 외교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의사로서 알렌의 입지도 다소 특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문학(同文學)이나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경우는 조선정부가 주체가 되어 교사를 채용한 만큼 적절한 지위와 보수를 보장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무규정을 부과하였다. 그에 비해 제중원 의사들에게는 이 같은 의무 규정이 없었다. 그 이유는 조선정부가 알렌을 비롯한 미국인 의사들을 고용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피고용인이 아니었으므로 의사에 대한 별도의 보수 규정도 없었다. 조선정부는 병원 건물과 운영경비를 지원했고, 선교부는 의료 인력을 파견해 실질적인 병원의 운영을 담당했다. 이처럼 제중원은 설립 초기부터 조선정부와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의료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시기 제중원의 운영방식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병원의 소유권은 조선정부가 갖고 있었으나 운영권은 선교부에 위탁한 위탁경영의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보다 비근한 예를 든다면 현재 서울시 소유의 시립 보라매병원을 서울대병원이 위탁경영하고 있는 형태에 정확히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울대병원이 시립 병원에 의료진을 파견해 운영하는 것은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제중원이 운영된 방식과 동일하다.


이런 이중성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는 제중원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조선정부의 방식이다. 조선정부는 제중원과 관련된 일을, 특히 제중원에서 진료하는 선교의사들에 관련된 일은 미 공사관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통해 처리했다. 만약 조선정부가 단독으로 제중원을 운영하였다면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 것이다.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 - 제중원의 선교부 이관

제중원의 선교부 이관


헤론의 사후 부임한 빈튼(C. C. Vinton)이 부임 직후부터 병원 재정의 자유로운 지출 등 제중원 운영과 관련되어 조선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조선정부와의 갈등으로 빈튼이 교체되고 후임으로 에비슨이 1893년 7월 도착하면서 제중원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1894년 4월 에비슨이 지방에 며칠 왕진을 갔다 온 사이에 수술실로 만들려고 준비해둔 방을 주사들이 마음대로 일본인 의사에게 세를 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주사들의 전횡이 계속되는 동안은 병원의 정상적 운영이 어렵다고 판단한 에비슨은 1894년 5월 10일자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일할 수 없으므로 사직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이와 함께 만약 조선정부가 제중원의 운영권을 전적으로 선교부에 넘긴다면 정부의 지원 없이 병원을 운영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당시 갑오개혁을 추진하며 재정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조선정부는 9월 27일 에비슨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그리고 운영권을 넘기는 마당에 조선관리들을 파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밝히고, 향후 제중원 부지를 반환할 경우에는 건물의 신개축에 들어간 비용을 청산하기로 하였다. 조선정부가 제중원의 운영권을 완전히 미국 선교부에 넘기는 데 동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1894년 9월말 이후 제중원은 에비슨의 전관 하에 미국 북장로회의 병원으로 운영되었다. 제중원이 설립된 지 9년만에 병원의 운영 주체와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이전의 제중원이 조선정부와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병원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데 반하여, 이제부터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단독으로 운영하는 민간병원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운영권이 선교부로 넘어온 1894년 이후부터 제중원은 명실상부한 선교병원으로 성격이 변환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제중원은 조선정부의 조직기구에서도 빠지게 된다. 병원으로 사용하는 건물과 대지는 조선정부의 소유이지만 제중원이란 병원 조직은 조선정부와는 무관해진 것이다. 특히 1904년 남대문밖에 새롭게 제중원, 즉 세브란스 병원을 짓고, 이듬해인 1905년에 과거 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과 대지를 조선정부에 반납함으로써 모든 관계는 정리된다.

제중원과 세브란스 병원의 연속성 - 연속의 증거

연속의 증거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자료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세브란스 내부의 자료이다. 이는 세브란스의 내부 구성원들이 제중원과 세브란스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자료이다. 다음으로는 외부의 자료이다. 이는 세브란스의 구성원들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제중원과 세브란스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를 말해주는 자료이다. 따라서 이 두 종류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제중원과 세브란스의 연속성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가) 내부 사료

세브란스 병원이 제중원을 이었음을 증언하는 내부의 자료는 무수히 많다. 여기서 그 자료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중요한 몇 가지 자료들만을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세브란스 병원 정초식 초청장을 들 수 있다. 1902년 11월 27일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서 새로 짓는 제중원인 세브란스병원의 정초석을 놓는 식이 열렸다. 이 정초식에 당시 조선에 있던 각국의 외교사절들과 정부의 인사들이 초청되었다. 초청장의 문구는 다음과 같다. “본 월 이십칠 일 오후 세 시에 남대문 밖 새로 짓는 제중원(세브란스기념병원) 기초의 모퉁이돌을 놓겠사오니 오셔서 참예하심을 바라옵니다. 제중원 백.” 이는 즉 세브란스병원의 설립 당시부터 세브란스병원과 제중원의 연속성이 전제가 되고 내부적으로도 인정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이 명백한 증거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제중원 의사들이 서양식 병원으로서의 제중원의 브랜드 가치를 선교의사들이 이용하기 위해 전임 근무지인 제중원을 병기한 경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중원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내외에 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거기에 일한 선교의사들이지 제중원의 행정주사나 김윤식과 같이 서양의학을 전혀 모르는 조선의 관료가 아니었다. 서울대병원은 마치 제중원의 브랜드 가치를 만든 사람이 따로 있고, 그것을 선교의사들이 이용하려고 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1900년대 에비슨은 국문 의학교과서를 여러 종류 발간했다. 이들 교과서의 표지에는 발행처가 황성 제중원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도 이후 세브란스에서 발간되는 요람을 비롯한 각종 학교 발행물, 또 선교보고서 등에도 공히 세브란스병원의 역사적 기원을 서술할 때는 반드시 제중원을 언급하고 있다. 이상의 사실은 세브란스의 내부 구성원들이 세브란스병원의 설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연속성을 인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반면 서울대병원은 적어도 1980년대까지 제중원을 서울대병원과 연결시키는 언급 자체가 외부적인 언급은커녕 내부적인 언급 자체도 부재한다. 총독부의원의 연혁이나 그것을 답습한 서울대병원의 연혁은 적어도 1980년대 이전에는 광제원을 자신들의 기원으로 기록했다. 제중원이 서울대병원의 뿌리라는 주장은 1980년대부터 스스로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 외부 사료

먼저 조선정부가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부르는 사료가 있다. 1906년 6월 4일자 의 기사로 여기에 제중원 찬성금 3,000원을 지출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정부가 제중원, 즉 세브란스병원에 찬성금을 지출하는 이유는 이전에 올린 내부문서에 다음과 같이 잘 기술되어 있다. “제중원의 설치가 이미 수십년이 지났는데 백성의 생명을 구제하는 데 열심이어서, 京都 민생의 병이 있으나 의지할 데가 없는 자와 치료를 하여도 효과가 없는 자가 제중원에 부축되어 이르면 정성을 다해 치료한다. 죽다가 살아나고 위험한 지경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자를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인데 아직 한마디 치하하는 말이 없고 한 푼 도와주는 돈이 없으니 이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제중원을 돕는 돈을 보내자는 의견이 이미 정부의 방침인 바 결코 보류할 수 없어 이에 송부하니 잘 검토한 다음 찬성금 3,000원을 예산 외에서 지출하여 제중원에 보내서 그 널리 시술하는 아름다운 뜻을 길이 장려함이 필요하다.”

여기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조선정부가 ‘제중원 찬성금 3,000원’을 지출하기로 결의한 것은 1906년으로 이는 1904년 세브란스병원이 설립되고, 1905년 과거 병원으로 사용하던 건물과 대지의 반환이 이루어진 이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즉 조선정부가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지고 난 이후에도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이라 지칭하고 있는 것은 조선정부가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의 연속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이 가장 공식적인 정부문서인 관보에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료에 대해 서울대병원은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찬성금을 주자고 발의한 사람들은 친일관료들일 것이라며, 엉뚱하게 찬성금 문제와 친일문제를 연결시켜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친일관료인지 분명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추측을 남발하는 서울대병원식의 역사서술은 여기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친일문제로 말하면 서울대병원은 할 말이 없다.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이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병원이기 때문이다. 대한의원 개원기념사진첩의 첫 장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이완용 등 을사오적의 사진이 실려 있다. 이는 단적으로 대한의원의 성격을 말해준다. 대한의원은 친일병원 정도가 아니라 일제의 병원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신문자료가 있다. 신문자료는 당대 사회의 일반적인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매체이다. 따라서 신문에 제중원과 세브란스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기사화되는가를 보면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알 수 있다. 우선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된 직후인 1900년대의 에는 세브란스 병원을 제중원으로 지칭하는 기사들이 여럿 나온다. 그뿐 아니다. 이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흐른 1920년대에도 여전히 신문에서는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으로 표기했다. 대표적으로 1922년 12월 14일자 에 실린 기사의 제목은 “제중원 입원료 각동이 모다 내려”이다. 기사의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남대문밖 제중원은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에 공헌이 많은 병원인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인데...” 여기서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진 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나 신문에서는 여전히 세브란스 병원을 제중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음을 말해주는 안팎의 사료들은 산재해 있다. 반면 서울대병원과 제중원의 관계, 혹은 연속성을 말해주는 역사적 사료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증거 사료의 부재를 서울대병원은 오로지 국립병원설이라는 허술한 논리의 주장 하나로 대신하고자 한다. 역사는 사료를 토대로 하는 것이지, 자신의 바람을 추측과 가정에 담아 전개하는 말장난이 아니다. 또 선교사들의 활동을 폄훼한다고 제중원이 서울대병원의 기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상식에 부합하는 역사인식을 바라는 바이다.

올리버 R. 에비슨 박사

올리버 R. 에비슨 박사


올리버 R. 에비슨 박사는 1860년 영국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건너왔으며, 1887년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수로 재임했다.

그는 1893년 부산으로 입국하여 11월 1일부터 제중원 4대 원장으로 봉직했다.

에비슨 박사는 기울어가던 제중원을 다시 살리기 위해 1894년 9월 조선정부로부터 제중원 운영권을 선교부로 이관 받았고 1895년 여름에는 서울에 만연된 콜레라 방역 사업을 위한 방역국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으며, 아울러 제중원에서 국내 첫 의학 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안식년을 맞아 1900년 5월 미국의 부호 루이스 H. 세브란스씨를 만나 병원 설립을 위한 1만 달러의 기금을 지원받아 1904년 9월 남대문 밖에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건립하고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병원(세브란스씨 기념병원)으로 바꿨다.

그는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학교의 교장으로 봉직함과 동시에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연희전문학교의 교장까지 겸직하며 한국인 인재를 양성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연세대학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세브란스에 대해 알고 싶은 몇가지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시점은 언제부터였을까요?

1885년 4월 10일, 미국인 선교의사 알렌(H. N. Allen, 1858~1932)의 병원설립 건의를 고종이 받아들여 개화파 홍영식의 집이었던 서울 재동(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을 세우면서부터입니다.

1884년 9월, 최초의 선교의사로 한국에 온 알렌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에서 심하게 부상을 당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을 살려내면서 서양의학의 효과를 입증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세워졌고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꾼 후 왕실에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진료하는 기관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개원 첫해만 10,000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고 하니 서양의학에 대한 당시 관심의 정도는 엄청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제중원은 보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1887년 구리개(현재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부근)로 이전, 병원의 규모를 확대했습니다.

제중원은 정부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동시에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전자는 재정지원과 행정을, 후자는 의사와 간호사의 파견 및 진료, 병원 운영 등을 담당했습니다.

1. 한국인 최초의 의료 선교사 알렌
2. 조선인 요리사와 나귀를 타고 왕진가는 알렌 (1885)

제중원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자 알렌은 계획한 대로 한국 내 의료진 양성을 위해 의학교육을 추진하였고, 드디어 1886년 3월 29일, 경쟁시험을 통해 선발된 16명의 학생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교육 기관인 제중원의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3. 구리개 제중원의 건물과 알렌 그리고 직원들
4. 알렌, 헤론 및 빈튼에 이어 내한하여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던 에비슨

1887년 9월, 알렌이 주미 한국 공사관의 참찬관으로 취임하자 제중원의 책임은 헤론(J. W. Heron), 빈튼(C. C. Vinton)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병원의 운영은 점차 부실해졌습니다.


그러자 1893년 7월, 새로 부임한 에비슨 (O.R. Avison, 1860~1956)은 정부에 제중원의 정상화를 위한 요구 조건을 내걸었고 마침 운영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었던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제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넘기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제중원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않는 완전한 사립기관이 되었습니다.


그후 에비슨을 비롯한 많은 선교의사들은 제중원을 중심으로 더욱 활발한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고 몇 명의 학생들을 모집하여 알렌이 시작했던 의학 교육을 다시 체계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이때 해부학을 비롯한 다양한 의학 교과서를 한글로 번역해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895년 우리나라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에비슨은 방역의 총책임자로서 제중원 직원들과 함께 방역과 환자 치료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5. 새로 지은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개원식초청장 (재단법인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1904)

항상 보다 나은 시설이 갖추어진 병원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던 에비슨은 1900년 미국에서 만난 클리블랜드시의 부호 세브란스(L. H. Severance, 1838~1913)에게서 병원 설립기금 45,000달러를 기부받아 마침내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맞은 편 세브란스빌딩 자리)에 병원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 대신 기증자의 이름을 딴 세브란스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세브란스는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에 의해 기부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1. 세브란스
2. 신축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 장면 (1904년경)

에비슨은 10여 년 동안의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정부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 1번에서 7번까지를 부여받았습니다.


1909년,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의학교로 개칭하였고 1913년에는 서울에 있던 각 선교 교파가 공동으로 세브란스를 지원하게 되면서 학교 이름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3.  허스트와 7명의 첫 졸업생(1908).

왼쪽부터 뒷줄 김필순, 홍석후, 신창희 

가운데 줄 홍종은, 허스트, 박서양

아랫줄 김희영 주현칙. (동은의학박물관)

4. 쉐플리의 치과진료(1917)

일제는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전문학교 규칙을 반포했는데 일반 사립기관으로서는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비슨을 포함한 선교의사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1917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가 인가되었습니다.


일제하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는 사립학교라는 특징을 발휘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같은 관·공립학교와 달리 오직 한국인 학생들만을 교육시켜서 일본인은 한 명도 의사로 양성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미국 선교부가 지원했지만 세브란스만큼 민족적인 학교는 없었습니다.

5. 간호부양성소
6. 무료진료를 담당했던 시료실

한 편 1906년 9월, 쉴즈(E. L. Shields, 1868~1941)가 세브 란스병원에 간호부양성소를 세웠으며, 1915년에는 쉐플리 (W. J. Scheifley, 1892~1958)가 내한하여 한국 최초의 전문 치과학교실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통해 세브란스는 한국민의 건강을 위해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시기에 진료 환자 중의 반이 무료 환자였는데, 주로 외국의 선교지원 단체에서 보내준 경비를 사용했습니다.


1942 년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아사히의학전문학교라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세브란스는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고 1947년에는 6년제 의과대학으로 개편되었습니다.


하지만 곧 닥쳐온 한국전쟁으로 인해 병원 및 간호학교 본부 등은 피난을 가야했고, 거제도나 원주, 청도에 구호병원을 개설하였습니다.


의과대학 역시 전시교육령에 따라 전시연합대학에 편입 되었습니다.


전쟁이 종결된 후 파괴된 건물 및 시설물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캠퍼스 구상을 계획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57년에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합동이 이루어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글자를 딴 연세대학교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962년, 미8군과 선교본부의 협력, 외부의 원조 등으로 인해 기존의 캠퍼스를 신촌으로 이전하였는데 이는 당시 동양 최대의 시설과 규모를 자랑하는 연세의료원이 준공되는 결실을 낳았습니다.

1. 원주 의과대학 (1979)
2. 의료원 마스터플랜 (1957)

3. 의료원 마스터플랜 (1957)

질문 : 광혜원과 광제원은 같은 곳이다?
답변 : 이름이 매우 비슷하지만 이 두 곳은 분명 다릅니다. 광혜원(제중원)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1885년 알렌의 건의로 설립되어 현재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입니다.

이에 비해 광제원은 조선정부가 1899년 서울에 설립한 내부병원을 개칭하여 세운 한방병원입니다.

그러나 광제원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과 함께 일제 통감부에 의해 세워진 대한의원에 흡수당하게 됩니다.
광혜원이

재동 제중원과 백송(경기여고 1934년 앨범)

질문 : 서울대 병원은 아직도 제중원이 자신의 뿌리라고 억지를 부리는데요?
답변 :이런 주장은 1980년대 초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입니다. 그 주장이 허구임은 이미 1998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에서 발굴한 자료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서울대병원 홈페이지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의대에서 제중원을 자신의 뿌리로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형식적으로 제중원이 ‘국립병원’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만 조선정부의 기관이었지 가장 중요한 의료활동에서는 선교사들이 독자성을 지니고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894년 9월 말 제중원의 운영권이 미국 선교부로 이관되면서 정부와의 관계는 완전히 청산되었고, 제중원은 순수한 사립병원으로 탈바꿈됩니다.

제중원이 서울대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조선정부가 세운 성균관이 국립서울대학교로 이어진다고 보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서울대병원은 ‘국립병원’이었던 광제원 역시 자신의 뿌리라고 하는데, 지방의 국립대병원이 “우리도 ‘국립’이니 광제원은 우리의 뿌리다”라고 주장한다면 인정할지 의문입니다.
대학의원

대학의원 개원식 기념 엽서

질문 : 대한의원과 자혜의원의 비밀을 밝혀라!
답변 :국사교과서에는‘정부가 대한의원과 자혜의원을 세워 신식 의료기술을 보급하고 의료시설을 확장하였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내용에 일단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문장의 표현만 보자면 대한의원과 자혜의원의 설립 주체를 ‘조선정부’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정부란 을사보호조약 이후의 시기이므로 일제의 통감부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한의원과 자혜의원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첫째, 일본지배에 대한 한국민의 반일 감정을 누르고 일본의 ‘선정(善政)’을 선전하고자 이 병원들을 이용했다는 점과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 병원들은 한국인보다는 일본인들이 더 많이 이용하는 병원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서울에 있었던 광제원, 관립의학교, 적십자병원을 통합시켜 설립한 대한의원과 각 지방 13개도에 설립한 자혜의원은 모두 일본의 식민정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입니다.
대학의원

대학의원 개원식 기념 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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