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을 한 것이 이곳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 을 주었습니다. … 그들은 제가 동맥을 묶고 상처를 꿰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들은 병원 계획에 관심을 갖고 있고 수용 이 되는 숫자만큼 병원에 와서 교육을 받고 싶어 합니다. 오늘 아 침 민영익은 그들이 저를 위대한 의사라고 생각하며, 제가 미국에 서 왔다는 것을 믿지 않고 이번 일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으 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1885년 2월 4일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갑신정변에서 입은 자상으로 거의 죽어가던 민영익을 살려낸 알 렌의 의술은 조선 왕실과 백성들에게 서양 의학의 효과를 알리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심지어 조선 사람들에게 알렌은 하늘에 서 내려온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특히 한의사들이 지혈조차 못하고 있을 때, 동맥을 잇고 깊은 상처를 봉합해 사람을 살려낸 서양 의학은 조선 사람들에게 경이적인 의술로 보였다.

알렌은 1858년 4월 23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태어났다. 청교도 가정의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그는 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의료선교사가 되 길 원했던 그는 콜럼버스와 마이애미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 하고 2년 만에 의사자격증을 취득했다. 서둘러 결혼을 한 뒤 중국 선교를 위해 태평양을 건넜던 그가 조선으로 건너왔을 때, 그의 나 이는 고작 스물여섯이었다. 그는 임상경험이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도 외과는 자신 없었다. 그런 그가 칼로 난도질 당해 생긴 상처를 치료하고 죽을 게 뻔해 보였던 환자를 살려냈으니 그 스스로도 놀 랄 일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기적은 곧 신화를 만 들어냈다. 서양 의학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고, 위기에 빠진 조선을 강한 국가로 만들어줄 것이라는 신화였다.

그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알렌은 더욱 냉정하게 자신의 역 할과 길을 탐색했다. 바로 근대 조선에 선교를 합법화하고, 의료 활동을 하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는 <병원설립안> 을 제안해 제중원의 건립을 이끌어냈다. 또 제중원이 병원으로 자 리를 잡자 미국 외교관으로 변신해 한미외교를 이끄는 수장이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서양 각국은 해외선교에서 의료와 교육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그 중 의료선교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피터 파커(Peter Parker, 1804-1888)는 미국 교회가 동아시아에 파견한 초기 의료선교사 중 한 명이었다.

1834년 중국 광저우에 도착한 그는 안과병원을 열었고, 중국에 서양 의학을 도입해 교육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후 파커는 미국의 외교 업무에도 관여하며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알렌이 의료선교의 롤 모델로 삼았던 인물이 바로 파커였다. 알렌이 처음 선교지로 선택했던 곳은 베이징이었지만, 25일 간의 긴 항해 끝에 그가 도착한 곳은 상하이였다.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머물렀던 알렌은 처음 접하는 이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중국의 반기독교 정서 때문에 중국인들의 공격을 받기 일쑤였고, 아내 패니의 건강도 악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는 파커 같은 선구자적 인물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좌절과 방황을 지켜본 동료들은 서울에 의사가 필요하니 그곳에서 ‘그 나라와 함께 성장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고, 알렌도 새 출발을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알렌은 외교관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 정부의 신임이 두터웠던 그는 조선과 미국 양국에게 외교적으로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알렌의 외교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알렌은 고종의 신임을 받으며 비공식적 자문활동을 통해 조선 정부의 반청자주외교를 지원했다. 미국에 공사관을 설치하는 것 역시 자주외교를 강화하는 일이었다. 1887년 고종은 알렌에게 참찬관이라는 관직을 하사하고, 주미 한국공사관원의 파견부터 공사관 설치에 이르는 전 과정에 관여하도록 했다.

1890년 알렌은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 공사관의 서기관이 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897년에는 미국 공사관의 최고 책임자인 미국 공사가 되었다. 전문 외교관으로 훈련받은 경험이 없었지만 알렌은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알렌만큼 조선 정부의 신임을 받고 있고, 한국 사정에 밝은 외교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렌의 외교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공헌은 당시 동아시아의 외교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청일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중요한 경쟁자인 중국을 물리친 일본은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와 대결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친일적인 동아시아 정책을 유지했는데, 알렌은 미국과 한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반일·친러 외교노선을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1903년 9월 알렌은 직접 워싱턴을 방문해 루즈벨트와 외교노선에 관한 논쟁을 벌였으며,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언론을 상대로 공개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05년 루즈벨트는 미국의 공식 외교노선에 반하는 성향을 가진 외교관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알렌을 미국공사에서 해임했다.

28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외교활동을 주도했던 알렌은 공직을 떠나 낙향해 만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루즈벨트 이후 대통령에 오른 윌리엄 태프트가 알렌의 반일노선을 정식 외교노선으로 채택했지만, 이미 조선은 식민지화의 길을 걷고 있었다.

글 신규환 교수(연세의대 의사학과) | 사진 동은의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