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아서 해주니 오히려 든든합니다


- 2년여 기도로 유산기부 결정한 이지자 씨 -


2011년 부부는 나란히 시신 기증을 서약했다.

그리고 유산 또한 선교사가 세운 병원 세브란스에 기부할 것도 약속했다.

남편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만, 아내는 그 오래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2015년 7월, 그해 여름은 참으로 가혹했다. 문제는 더위가 아니었다.

벼락같은 선고가 일상을 관통하며 삶을 절단냈다.


7월 18일 출발하는 여행을 앞두고 부부는 설렘과 기대로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남편 김택현 씨는 “몸이 좀 이상해” 하면서 근처 내과를 대수롭지 않게 들락거렸다.

약을 먹어도 전혀 쾌청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자, 의사는 “초음파를 한번 해볼까요?”했다. 그러라고 했다.

의사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좀 더 큰 병원에 가봐야 한다고 말했다.

믿어지지 않았고, 믿을 수도 없는선고였다.


7월 17일, 남편은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암세포는 이미 간까지 정복한 상태였다.

여행은 취소되었고, 부부는 시한부라는 무시무시한 시간 앞에 서야 했다.



천하에 자유로운 영혼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남편 김택현 씨와 아내 이지자 씨가 살아온 삶은 평온했다. 자식이 없었지만 그일이 그렇게 절박하진 않았다.

“당연히 자녀를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도 절실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거든요.

둘이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각자 일이 있으니까 바쁘기도 했고요.” 아내 이지자 씨는 남편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대구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나 결혼했다.

남편 김택현 씨는 중앙일보 보도 사진기자로 입사해 한국 최초로 1977년 북극과 1979년 남극을 탐험하며 카메라에 담았다.

1981년에는 아프리카를 종단으로 탐험하며 아프리카 대륙의 풍경과 사람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해외여행은커녕 여권 내기도 쉽지 않았던 그 시절, 남편은 천하에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극한의 오지를 누비며 카메라를 메고 행복한 시간을 누렸다.


1988년 국민일보가 창간하면서 김택현 씨는 국민일보 사진부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0년 후 아내 이지자 씨가 28년간 몸담았던 교직 생활에서 명예퇴직하자 부부는 미국으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친정 식구들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었거든요. 오래전에 해둔 이민 신청이 나왔더라고요.

그런데 가서 살아보니까 한국 사람에겐 한국이 맞는 것 같아서 2006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호스피스 봉사하던 남편의 제안


남편은 그때부터 호스피스 봉사를 시작했다. 임종을 앞둔 이들의 마지막 길에서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손을 잡아주었다.


“남편은 결정에는 신중한 편인데, 판단이 서면 확실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어요.

호스피스 봉사를 하면서 세례 받기를 원하는 말기암 환자들을 위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이들 가까이에 있다가 세례라는 의식이 필요한 순간, 지체 없이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죠.

순전히 그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2011년 남편은 시신 기증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죽음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만나는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오래 했던 남편의 생각이었기에 이지자 씨는 순순히 따라나섰고,

함께 세브란스병원에 와서 나란히 사전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남편의 호스피스 자원봉사는 계속되었다. 남편은 그렇게 10년 여를 임종을 앞둔 환자들 곁에 있었다.



시신 기증과 유산 기부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랬던 걸까…” 이지자 씨는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평소에 그렇게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하던 사람이었는데, 췌장암 진단받고 두 달 반 살다 떠났어요.

항암치료는 한 번밖에 하지 않았어요. 거의 두 달을 병원에만 있었고.

그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도 안 나요.”


남편은 그렇게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생전에 약속한 대로 남편의 몸은 의대생들이 의학지식을 쌓고 의술을 발전시키는 데 쓰여지기 위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3일의 장례 기간을 거쳐 화장되는 여느 장례식과 달리, 남편은 세브란스병원에 1년여 안치되어 있었다.

황급히 이생을 떠났지만, 남편 몸이 1년여 세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아내에겐 한자락 위로가 되었다.


“살아 있을 때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우리가 떠나면 재산이 좀 남을텐데 어떻게 할까?

기부하자, 어디에 기부할까?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하자. 선교사들이 와서 처음 세운 병원이니까.”


남편은 10년의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하면서 늘 죽음을 의식하며 살았다.

시신 기증과 재산 기부에 대한 생각이 분명했다. 설령 자녀가 있더라도 재산을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

부모가 근검절약하며 살뜰히 모은 재산일지언정, 제 힘으로 모으지 않은 재산이 자녀에게 유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2015년 가을도, 겨울도 이지자 씨의 기억에는 없다. 2016년 새 봄이 왔지만 그 봄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남편의 부재가 남긴 허전함에 잠겨 있긴 하지만, 이지자 씨는 남편이 떠나고 1년을 그야말로 ‘무력증’ 속에 보냈다고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기부


남편과 자신이 남기게 될 유산은 부동산과 유동자산을 포함해 30억이 훨씬 넘는다.

얼마 전 이지자 씨는 연세의료원 앞으로 유산기부를 마쳤다.



“하나님이 재산을 주실 때는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건 아니거든요.

예수님도 아픈 이들을 각별히 사랑하셨잖아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유산을 쓰고 싶습니다.

이 일을 위해 2년 정도 기도했습니다. 유산을 어떻게 써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 결론은 세브란스에 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지자 씨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떠난 후에 남는 몸뚱이도, 재산도 모두 세브란스에서 알아서 깨끗하게 정리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의지하는 마음이 들 정도다. 

생전의 남편과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잘 마무리한 지금, 그녀는 홀가분하다.


요즘 교회 안팎에서 봉사활동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지자 씨.

그녀는 남편이 써놓은 마지막 문장과 같은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인생은 해석이고 행복은 선택입니다. 인생의 후반부는 받은 모든 것을 돌려주는 시간이 되고자 기도합니다.

남은 인생을 아름답게, 행복한 선택을 하여 이 생명 끝까지 겸손한 섬김의 자세가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